알렉산드로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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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일본의 록밴드에 대한 내용은 Alexandros 문서
1. 개요[편집]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 아르게아스 왕조의 26대 왕이자 2대 코린토스 동맹 의장이며, 헬레니즘 제국의 건립자.만약, 그가 신이 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그를 신으로 여길 수밖에.
영어 이름인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으로 유명하다. 아랍어권에서는 이를 음역한 페르시아 어형인 이스칸다르(الإسكندر)라고 부른다. 그는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 중 하나로 꼽힌다. 훗날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이 모범으로 삼았을 정도로 후대의 세계에까지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상세[편집]
고대 시대를 대표하는 정복왕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즉위하기 이전부터 군사적인 능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가 즉위한 그해에 아버지였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코린토스 동맹을 맺은 고대 그리스 국가 중 하나였던 테베가 이러한 어린 왕의 즉위를 틈타 마케도니아에 어린 아이가 올랐으니 혼란스러울 거라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그 즉시 반란을 진압했음은 물론, 곧바로 테베를 소멸시켜 버렸다. 이후 동쪽으로 오랫동안 그리스 영토를 침입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것도 모자라,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고, 나아가 지금의 인도 부근까지 정벌하여 고대 그리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인물이다.
게다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은 단지 군사적인 업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수학, 과학 기술의 발달과 그의 정복 전쟁으로 인한 동서양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로 인해 탄생한 세계시민주의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문화이며, 이는 전 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주게 된다. 한국의 석굴암 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간다라양식도 거슬러 올라가면 알렉산드로스의 업적과 관련된 것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지만, 그가 짧은 인생 동안 남긴 업적은 너무나도 거대하다.
참고로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스승만큼이나 명성이 자자한 플라톤이고, 또 그 플라톤의 제자가 마찬가지로 대단한 위인인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바로 알렉산드로스이다.[1]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인 철학의 거인들이 3대를 거쳐 이어온 가르침을 당시 젊었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직접 받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유명한 인물도 있었지만 이 사제 라인업은 대단해도 워낙 대단해서 특히 많이 알려져 있다.
3.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알렉산드로스 3세/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전투 연대기[편집]
- 카이로네이아 전투(기원전 338년) - 필리포스 2세의 지휘하에 아테네-테베-아르고스 연합군 격파.
- 하이모스 산 전투(기원전 335년) - 트라키아인 격파.
- 페우체 섬 공방전(기원전 335년) - 게타이족과 트라키아 연합군 격파.
- 펠리움 공방전(기원전 335년) - 일리리아족 격파.
- 테베 공방전(기원전 335년) - 테베 정복과 파괴.
- 그라니코스 전투(기원전 334년) - 아케메네스 왕조의 소아시아 사트라프 격파.
- 밀레투스 공방전(기원전 334년) - 아케메네스 왕조에 귀속된 밀레투스 공략.
- 할리카르나소스 공방전(기원전 334년) - 아케메네스 왕조의 명장 멤논과의 일전.
- 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 - 다리우스 3세의 아케메네스 왕조군 격파.
- 티레 공방전(기원전 332년) - 티레 정복과 파괴.
- 가자 공방전(기원전 332년) - 가자 정복과 파괴.
- 가우가멜라 전투(기원전 331년) - 다리우스 3세의 아케메네스 왕조군 격파.
- 욱시이 협곡 전투(기원전 331년) - 욱시이 부족 정복.
- 페르시아 관문 전투(기원전 330년) - 페르세폴리스로 진군하던 중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가 길목을 차단하면서 벌어진 전투.
- 키로폴리스 공방전(기원전 329년) - 소그디아나인의 중심지인 키로폴리스 공략.
- 야크사르 전투(기원전 329년) - 사카족 격파.
- 소그디안 바위 요새 공방전(기원전 327년) - 소그디아나인의 천혜의 요새 공략.
- 코리에네스 바위 요새 공방전(기원전 327년) - 파레이타카이족의 천혜의 요새 공략.
- 코펜 원정(기원전 327년 ~ 기원전 326년) - 카불 계곡의 부족 정벌.
- 아오르노스 공방전(기원전 326년) - 아스바카족의 아오르노스 요새 공략.
- 히다스페스 전투(기원전 326년) - 포루스의 파우라바 왕조군 격파.
- 상갈라 공방전(기원전 326년) - 카타에이족 격파.
- 말리 원정(기원전 326년 ~ 기원전 325년) - 인더스 강 하류에 거주하는 말리족의 도시들 공략.
5. 인품과 능력[편집]
5.1. 인품[편집]
어릴 적의 스승은 레오니다스이며[2] 좀 더 컸을 때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서구 철학사에서 플라톤과 더불어 쌍벽으로 예우받는 위대한 철학자이다. 단, 왕자 신분이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온전히 이어받아 학자로 활동한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의 정복 전쟁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굉장히 깊은 단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습득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버트런드 러셀은 플루타르코스가 과장했다고 여겼는데, 실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알렉산드로스의 행보 사이에 별 관련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계획도시들을 줄줄이 세우고, 책의 중요성을 강조해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세울 목적으로 20만여 권에 달하는 책을 모으고, 또 자신의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동행시켜 가는 곳곳마다 학문의 융성을 이뤄내는 등 결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적다고 할 수 없는 학문 친화적인 행보들을 보였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훗날 뛰어난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에서 줄줄이 쏟아지는 결과를 만들었다. 수학, 과학, 논리학을 포함해 현대 문명의 핵심 근간이 된 서양 문명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상당 부분이 기원했는데, 학문을 사랑했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성향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환경에서 배출된 아르키메데스가 후대의 기라성같은 과학자들에게 준 영향력들과 유클리드의 원론이 현재 문명에까지 주고 있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학문적인 환경을 당시 세계 곳곳에 조성하거나 전파한 점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일반적인 정복 군주들과는 달리 알렉산드로스 본인이 철학, 과학, 문학 등 다방면의 학문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책을 사랑하고 연구를 장려하는 정책들을 항상 견지했으며 또한 현대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인권개념이 부족했던 고대 시대의 인물이었음에도 포로로 잡은 적국 사람들 중 학자, 시인과 같은 예술적인 인간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죽이지 않는 등 아량을 보였다.
그리스식 영웅주의에 완전히 빠져 있어서 베개 밑에 《일리아스》를 넣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 《일리아스》를 추천해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알렉산드로스가 항상 갖고 다닌 《일리아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작성해 준 요약 필사본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야망이 매우 커서, 부왕인 필리포스의 승전 소식을 들을 때면 매우 울적해하며 친구들에게
라고 말하기도 했다. 거기에 작은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큰 영광과 명성만을 탐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평생을 가서 알렉산드로스가 왕자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부친께서 이렇게 나라들을 계속 정복하신다면 나와 너희가 자라서 펼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이라고 말했다."좋다. 왕들과 겨룰 수 있다면."
부케팔로스의 일화에서 보이듯, 배짱이 매우 강했다. 자신감이 늘 넘쳐났고, 죽음에 두려움을 보이는 일 없이 용감하였다.[3] 모든 전투에서 황금 빛 갑옷을 입고 선두에 선 것은 유명하며, 이로 인해 11차례의 크고 작은 부상들을 입었다. 가장 극적인 전투였던 가우가멜라 전투 때에는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기가 찬 파르메니온이 가서 직접 깨우자, 눈을 비비며 일어나
라고 했다. 카파도키아 반도를 넘어가던 중,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얼음장 같은 온도에, 폐렴이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하였는데, 어의들은 혹 자기에게 책임이 물어질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필리포스라는 한 의사만이 대왕에 대한 애정으로 나서서 그를 간호하고 약을 지어줬는데, 며칠 후 정신이 좀 든 알렉산드로스에게 파르메니온이 쓴 편지가 왔다. 편지의 내용인즉"우리가 이미 이기지 않았소? 도망다니던 다리우스를 쫓아다니느라 우리가 기진맥진하였을 정도니 말이오."
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의사가 약을 들고 천막으로 들어오자, 알렉산드로스는 사발을 받고 쭈욱 들이키며 의사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편지를 읽은 의사는 바로 사색이 되어 땅에 엎드렸다. 의사는 자신은 절대 이러한 의도가 없다며 살려달라 외쳤고[4] 알렉산드로스는 남은 약을 들이킨 뒤, 미소를 지으며 의사를 일으켜 세웠다. 군의 2인자인 파르메니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신뢰한 것이고 이는 들어맞았다."그 의사는 사실 다리우스의 사위가 될 욕심으로 페르시아와 내통하여 전하를 죽이려 하고 있으며, 약을 통해 독살을 하려 한다."
하지만 부하들의 불평을 흘려듣지 않고 간언을 듣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고 하나, 이건 인도 원정을 중간에 그만두고 회군한 것처럼 예외의 경우들이다. 파르메니온과 클레이투스와 칼리스테네스가 괜히 죽은 것이 아니다.
이집트에서 신탁을 받은 뒤로는 자신이 신이라 믿기도 하였다. 인도에서 회군하던 때, 화살을 맞은 그가 피를 흘리며
라고 슬프게 말하기도 했다."이것은 신의 피가 아니라, 인간의 피로구나."
물욕, 육욕에 대하여 자제를 하려는 모습은 보였다. 이소스 전투 이후, 아름답기로 소문난 다리우스의 아내 스타테이라 1세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라고 부하들에게 말하기도 했으며,[5]"그녀의 미모를 나에게 말하지도, 상기시키지도 말 것이다."
라면서도,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페르시아의 여자들은 눈이 아플만큼 아름답다고 하더구나."
식욕 또한 필요한 만큼만 먹고, 그 이상 낭비는 하지 않았는데,
라고 하기도 했다. 원정 중반을 넘어가며, 재화가 숙영지에 넘쳐흐르던 때부터는 식사가 사치스러워졌으나,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늘 군인다운 검소한 삶을 이야기했다. 이는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6]"저는 레오니다스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식사법을 배웠으니 훌륭한 요리사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아침을 맛있게 먹으려면 야간 행군을 하고, 저녁을 맛있게 먹으려면 아침을 적게 먹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물욕이 없는 만큼, 베푸는 것의 기쁨을 잘 아는 이가 알렉산드로스였는데, 그는 주위의 인물들에게 지나치리만큼 후한 대접을 하여, 친구들이나 동료 장군들의 부는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페르시아의 한 고관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라고 할 정도였다. 이게 어느 정도였나 하면, 장군도 아닌 서기관 에우메네스가 자기 막사에 숨겨놓은 돈이 금과 은을 합쳐 1,000탈렌트 이상이었을 정도다.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 중 가장 부유했던 아테네의 1년 예산이 400탈렌트 정도였으니 그의 제장들은 모두 재벌급의 부호였다고 볼 수 있다.[7]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겨울 수도인 수사에 있었던 국고에서 50,000탈렌트를, 종교적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국고에서 120,000탈렌트를 전리품으로 얻는 데 성공했는데 이 중 군비를 제외한 상당한 액수를 제장들에게 나눠 주었을 것이다. 일개 병사들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마찬가지여서, 어느날 나귀가 지나치게 무거운 보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을 본 병사가 보물을 나눠 짊어지자, 대왕이 몸소 그 옆으로 다가가"대왕께서 오시기 전에 페르시아에는 다리우스 왕 하나뿐이었지만, 이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여럿입니다."
라고 하기도 했다."힘을 내거라. 캠프까지 네가 그 보물을 들고 간다면 그것은 모두 너의 것이 될 것이다."
인정도 깊어, 한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거짓되게 진술하고 전역하려 한 것이 걸렸는데, 그 사유가 고향에 두고 온 연인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을 알게 되자, 대왕이 이를 용서하며 그를 전역시켜 준 적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점령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귀족들에게도 융화 정책을 펴서 그들의 충성을 얻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철학에 감화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으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도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집트에 갔을 때, 굳이 파라오 칭호를 받은 것도 이집트인을 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페르시아에 쳐들어갔을 때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복수하자고 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이끌었다. 문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랑 휴전을 했던 것. 그리스인들이 야만인[8] 의 지배를 받는 걸 못마땅해하자 시선을 밖으로 돌린 것이다. 그런 이후에도 그 야만인들을 잘 구슬려서 충성을 받은 걸 보면 정치적인 융화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제력이 매우 강한 편이긴 하였으나, 동시에 충동적 행동을 할 때도 있긴 했다. 자제력이 강한 모습들도 이러한 충동적 성격 때문에 생겨난 태도가 아닐까 싶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고 후회한 것, 에우메네스의 막사에 불을 지르고 후회한 것, 술에 취해 자신의 은인이자 신뢰받던 장군이던 클레이토스를 죽인 것 등이 그것이다.
5.2. 사생활[편집]
아내를 여럿[9][10] 두었다. 첫 번째 왕비는 박트리아 부족장의 딸인 록사나였는데, 록사나와 결혼한 이유는 아마 다리우스 3세의 장녀 스타테이라 2세[11]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막내딸 파리사티스 2세와 결혼한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록사나와 관계를 맺어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를 두었으나 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원정에 쏟아부었고, 아들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요절했으니 함께 했던 시간은 극히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알렉산드로스는 적장이었던 로도스의 멤논의 아내였던 바르시네를 후궁으로 삼아 또 다른 아들도 두었는데 이름은 헤라클레스였다.[12] 이들 이전에 캄파스페라는 여인에게 푹 빠졌다고도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이자 최측근이던 헤파이스티온은 흔히 알렉산더의 동성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13]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시로선 작은 키에 외모도 평범한 편이었고 오히려 헤파이스티온이 더 키도 크고 잘생겨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박살내고 그의 어머니 시시감비스와 아내 스타테이라 1세가 있는 막사에 들어왔을 때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그외 일가는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인 줄 알고 그 앞에 엎드렸다는 얘기가 있다. 헤파이스티온이 정말로 그의 연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알렉산드로스에게는 그 누구보다 절친한 친우이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족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은 변치 않는다. 헤파이스티온이 사망할 당시에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슬픔과 좌절감에 사로잡혀서 헤파이스티온의 건강을 돌본 의원을 죽이기까지 했으며, 죽은 헤파이스티온을 기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거대한 기념물들을 건축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또다른 동성 연인으로 유력한 인물은 페르시아 출신의 미소년 환관이었던 바고아스였다. 그는 외모가 아름답고 가무에 능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총애를 받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인도를 떠나 게드로시아 사막을 횡단한 후에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무용 경연이 열었는데, 당시에 바고아스가 아름다운 춤을 추어 우승하고 덤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키스를 나누었다고 한다. 바고아스는 관련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심지어 바고아스를 주인공으로 한 《Persian Boy》라는 소설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는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두 사랑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그의 성 정체성은 양성애자로 보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한 작가는 호메로스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일리아스》를
이라며 단검과 함께 베개 밑에 간직했다고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가 전한다. 전장에 나가면서도 호메로스의 책을 지참했으며 배개 밑에 《일리아스》를 놓고 함께 잤다고 한다. 아시아 원정중에도 《일리아스》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거기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원정과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모든 군사적 덕성과 지식을 담고 있는 완벽한 보물”
5.3. 외모 논란[편집]
고대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를 꽃미남으로 묘사해 기록해 놓았고, 남아 있는 조각상에서도 일반적으로는 준수한 미청년의 모습을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각가 리시포스가 남긴 흉상의 레플리카가 가장 신뢰할 만한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가장 못생기게 묘사된 작품 기준으로도 터프한 미남이고 평균적으로 굉장한 꽃미남이다.[14] 어쨌든 추남은 아니라는 데에 유의.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20세기에 들면서부터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남아 있는 전신상들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자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이에 대해서는 이른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즉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나타났던 어떤 미적인 규칙을 준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고대 역사가 아리아노스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는 한쪽 눈은 검푸르고 다른쪽 눈은 하늘색, 그러니까 오드아이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어떤 유전적인 장애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15]
이러한 의견을 종합하다시피 한 사람이 영국의 역사가 피터 그린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평균적인 마케도니아 남자의 키에도 못 미치고 몸은 뒤틀려 있고, 목소리는 쉿쉿거리는 데다 수염도 성기게 나기 때문에 멋이 안 나서 일부러 면도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16]
다만 혹자들이 제기하곤 하는 필리포스 왕이 이러한 알렉산드로스의 외모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택하는 것을 망설였을 수도 있다는 가설은 가능성이 희박한데, 일단 알렉산드로스의 외모가 당시 기준으로 어떠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지닌 여러 외모상의 문제점, 그러니까 뒤틀어진 골격이나 오드아이, 거친 목소리 등을 부왕 필리포스로부터의 유전, 나아가서는 당시 마케도니아 아르게아스 왕실의 유전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서출 형제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의 장애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추측되는 부분이 있기에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외모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어쨌든 알렉산드로스의 외모에 대해서는 꽃미남설이 다수설이다.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부각되었는데, 그의 외모에 대한 논쟁은 그에 대한 논쟁들 중 메이저는 아닐지라도 2,000년은 족히 지속되어온 장기 떡밥이다.
일단 정설로 취급받는 학설은 추남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역사에 회자될 정도의 추남이었다면 그에 관련된 루머나 역사책이 상당 수 남아 있어야 정상인데, 보통 사람도 아니고 그 당시 세계의 절반을 휩쓸었던 양반인데도 이에 관한 관련 기록이 없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신체적 결함에 대해서도 소소한 장애는 보유하고 있을 수 있어도 행동에 지장을 줄 정도의 장애는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일화 중에 날뛰는 난폭한 말에 올라탔다는 일화, 무용담, 또 왕에게 심각한 신체적 결함이 있을 경우 왕이 되기 힘든 그 당시 사회상, 언제나 전쟁터에 군대와 함께 섰었다는 걸 생각했을 때 장애설은 신빙성이 낮다. 애초부터 신체적 능력이 나약한 사람이 전쟁터에서 선봉에 서고도 항상 이기고 살아 돌아오는 걸 반복할 가능성은 낮다. 물론 신체 장애가 있음에도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친 사례도 상당히 있는 편이며, 한 예로 영국의 리처드 3세는 심한 척추측만증으로 별명이 곱추 왕이었지만 전쟁터에서 뛰어난 기사로 이름을 남겼다. 현대에 척추측만증 환자를 섭외하여 진행한 실험에서도 보병 전투 시에는 쉽게 지쳐버리는 문제가 있지만 기마 전투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싸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절름발이였던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는 왕이 되려 하자 불구인 왕이 나라를 몰락시킨다는 신탁이 나왔다. 그러나 리산드로스가 신탁에 대해 부정한 태생의 사람이 왕이 되면 왕국이 절름발이가 된다는 의미로 주장하여 사생아로 의심을 받던 조카를 제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추남설은 근거 자체가 희박하다. 그의 조각상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Contrapposto, 즉 인물이 한쪽으로 기울고 짝다리를 서는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기원전 5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해 중세 전, 그리고 르네상스 시절에 부활해 널리 쓰인 방식이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이나 서기 3세기에 만들어진 파르네세 헤라클레스 조각상 역시 저런 식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애초에 알렉산드로스의 친구이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시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역시 그리스식으로 조각된 전신 조각상들을 보면 한쪽으로 기울어져있다. 알렉산더의 조각상이 기울었으니 본인도 몸이 뒤틀렸다는 논리라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이 신화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했던 헤라클레스의 몸도 뒤틀린 인물로 여겼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남은 근거는 오드아이 뿐인데 오드아이가 되는 이유는 유전장애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고, 오드아이이면서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거나 오히려 뛰어난 신체능력을 지닌 경우도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메이저리그 투수 맥스 슈어저 .
애당초 위에 나온 추남설은 대다수가 근대에 와서 제시되기 시작한 의견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는 미녀가 아니었다." 등과 비슷한 맥락으로, 그 당시의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었다.확실하게 미남인지, 평범한지, 추남인지는 유해를 살펴보아야 하지만, 유해가 있을 곳으로 보이는 지역이 알렉산드리아이고 유력한 곳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궁전 단지인데, 바닷속인 데다가 추정만 할 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5.4. 군사 능력[편집]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을 뽑을 때 제일 많이 거론되는 인물들 중 한 명이다. 자기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제우스의 아들, 즉 신이라고 믿었으며 전투에서 가장 사망률이 높은 최선두에 서서 눈에 띄는 황금 갑옷을 입고 싸울 정도로 겁이 없고 용맹했다. 2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때 어린 아이가 왕이 되었으니 혼란스러울 것이라 판단한 고대 그리스 국가 테베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을 진압함은 물론 테베를 아예 멸망시켜버렸다.
마케도니아의 50,000명이 안 되는 군대를 이끌고 동원 가능 병력이 수십만에 이르는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 전역을 7년 만에 정복했다. 기록으로 정확하게 전해지는 전투만 40여 번을 벌여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심지어 이 전투들은 대부분 원정에 병력적 열세라는 불리한 상황에서 치룬 전투들이다.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보급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 알렉산드로스를 결정적으로 차별화하는 부분은, 이 모든 승리를 본인이 선두에 서서 얻었다는 것이다.
전술적 역량도 뛰어났지만 그 전술의 핵심이 본인의 무력을 이용한 선두 공격을 바탕으로 펼쳐졌기에 개인으로서의 전투력도 인류 정점급으로 꼽힌다. 누구나 그가 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반짝이는 황금 갑옷을 입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적들을 쳐죽였다는데, 이것은 당연히 굉장히 위험한 수로 개인의 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왕의 허무한 전사와 부대의 와해로 이어지는 도박이었다. 당장 페르시아 측에서 본인들의 왕이 도주할 때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감안하면 이는 명백하다.[17] 흥미롭게도 뛰어난 무력을 지닌 지휘관으로 유명한 항우와 리처드 1세는 현대 기준으로도 거구[18] 들이었고, 이 두 지휘관에겐 당대 왜소한 체격의 병사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근골격계와 긴 리치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알렉산드로스 3세는 당대 기준으로도 평범한 체격이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의 무용과 생존은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왕 본인이 선두에 서서 적진의 중심부를 직접 공격한 기행에 가까운 무용을 반복한 것은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고, 특히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가장 결정적인 전투였던 이소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열세인 전력 차를 본인을 선봉으로 한 중심부 돌파로 이겼다. 당연히 본인의 무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전사했을 것이고 페르시아 제국 정복이란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운이 따랐을지언정 수십 번의 최전방 전투를 치르면서 죽거나 불구가 되지 않은 것은 총기가 없던 냉병기 시대인 것을 감안해도 실로 경이로운 기록이다. 유튜브에 흔한 대규모 전투 시뮬레이션을 봐도 클로즈업된 시점에선 피아 식별도 힘든 흙먼지 속 아수라장에서 뒤엉킨 병력들과 비 오듯이 날아오는 화살 등으로 정신이 없는데, 현실은 더군다나 1인칭이고 눈에 띄는 갑주를 입은 왕을 향해 공격이 쏟아진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고도의 집중력과 극한의 체력소모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수십 번이나 꼭짓점에서 끊임없이 적을 베는 동시에 부대를 지휘하며 매번 승리를 이끌었다.[20] 이런 과정에서 멀쩡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온 몸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있었고, 말리 원정에서는 흉갑에 화살을 맞아 죽을 뻔 했다.
당시 그리스 전역의 인구를 다 합쳐봐야 2~300만조차 넉넉한 추정치인 데 비해,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는 최소한 1000만에서 평균적으로는 2~3000만, 그리고 오버하는 학자의 경우 무려 8000만까지 추정하는 단일 국가로서 당대 최대의 인구 대국이었다. 그만큼 그리스와 페르시아 두 세계 간에는 넘사벽의 국력 차가 존재했으며 이미 그리스가 과거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방어전과 정복전은 난이도가 천지 차이다. 유목민처럼 청소년 이상의 거의 모든 남성이 기병대가 되는 사례를 제외하고, 정주(定住) 문명 간의 싸움에서 알렉산드로스만큼 큰 국력 차를 뒤집고, 그것도 방어전이 아니라 정복전에서 승리한 예는 세계사를 통틀어도 찾기 힘들다.[21]
6. 평가[편집]
알렉산드로스의 행보는 사실 냉철한 현실주의적 행적들이라기보다는, 야망에 불타오르는 영웅의 서사시에 가까운 느낌을 줄 때가 많다. 그런 모험들로 수많은 전쟁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고 세계를 정복했었다는 게 오히려 그의 탁월한 능력들을 더욱더 보여주는 격이긴 하지만. 이를 테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기록된 그의 왕자 시절 모습과, 군주 시절의 원정 준비 작업을 살짝 들여다보자.
또한 그는 전장에서도 자신의 안전을 내팽개치고는, 전투 대형의 맨앞에서 보통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위험을 무릅썼다. 특히 적들은 복장을 통해 알렉산드로스가 국왕임을 알아볼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유사시 그가 사망하여 발생할 정국의 불안정을 막기 위해 혼인해서 자식을 낳을 때까지 정복을 멈춰달라는 조언들마저도 무시했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일화이기는 하지만 그는 후계자에 대해서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어느 중요한 도시를 함락했다거나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금도 기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투덜거렸다. "이러다가는 아버지한테 일을 다 뺏겨서, 우리는 크고 빛나는 사업도 못 하고 말겠어."
쾌락과 돈보다는 영광과 명성을 더욱 갈망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토가 넓어질수록 자기가 정복할 땅이 적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결코 안일한 생활과 호사스러움이 보장되는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외적을 가진 나라의 왕위를 계승받아 용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군대는 보병 30,000명과 기병 4,000명이었다는 설도 있고, 보병 43,000명 그리고 기병 3,000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아리스토불로스의 설에 의하면 그는 70탈렌트 정도의 군자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두리스의 설로는 군량미 30일 분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오네시크리토스는 당시 알렉산드로스에게 200탈렌트의 빚이 있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어쨌든 대규모적인 계획의 준비로서는 변변치 못한 준비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의 일이 염려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어떤 자에게는 많은 토지를 주고, 어떤 자에게는 한 마을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구를 주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신분에 맞도록 각각 재산을 나누어 준 다음에야 군비를 수송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라고 그는 대부분의 왕실 재산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그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남겨 놓으셨습니까?"
알렉산드로스가 대답했다. "희망".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말했다.
"그럼 대왕을 모시고 떠나는 저희들도 그 희망을 나누어 갖겠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렉산드로스 열전> 中
라는 말만 남기고는 역사에서 퇴장했다. 당연히 이러한 행동들은 국가와 국민을 다스리는 군주들이 함부로 따라해서는 너무 곤란한 무모함들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며 웅장한 제국을 건설한 대왕의 인생과 경력은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멋과 낭만이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사후 많은 군주들과 지도자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대왕병을 앓게 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포함해 많은 지도자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일례로 로마 제국의 엄청난 네임드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명한 일화도 들 수 있는데''', 카이사르가 33세의 나이에"가장 강한 자!"(κράτιστος)
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개탄했다는 이 일화는 유명하다.[22]"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내 나이에 세계를 정복하고 죽었지만, 나는 이 나이에 이를 때까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화가 결합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물론 헬레니즘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에다가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합쳐놓은 정도의 판도이기에, 넓기는 하지만 몽골 제국이나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 같은 후대의 거대 제국들에 비하면 "의외로 작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대 그리스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세계의 유서 깊은 문명 지역이란, 그리스, 이집트, 레반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란 고원, 인도였으며, 이러한 꿀땅들 중 인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했다. 서쪽에서는 신흥 강호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를 정복해 나가고 있었고, 결코 얕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나, 당대에는 유서 깊은 문명권이라 하기엔 부족했다. 한편, 동쪽 멀리에 전국시대의 중국이 있었지만, 히말라야에서 천산에 이르는 거대한 장벽을 경계로 동•서방 사이에 아직 존재 파악조차 거의 안 되던 때였다. 게다가 대영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형성된 거대 제국이기에, 개인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비견될 만큼 땅을 팍팍 정복한 군주는 칭기즈 칸 등 정말 몇 안 된다. 칭기즈 칸도 정벌한 나라를 보면 인구 밀도가 낮은 국가들이 대부분이고[23] 거기다 몽골 민족의 특유의 기동성 덕분에 확장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그리스는 기마 민족처럼 말을 잘 다룰 수 있는 편이 아니었고 훗날,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들이 잘 발달되지 않던 그런 고대에, 단기간에 페르시아라는 큰 제국을 삼켜버렸고 나아가 인도까지 진출했으며, 그의 사후 제국이 분열되었고 이후에 영토가 제대로 확장되지 못한 것을 보면 확실히 정복 군주로서 높은 평가를 줄 수 있다.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교통이 잘 발달되지 않은 편이고 다른 나라에 대한 지식은 아예 알려지지 않거나 오히려 전설로 치부하거나 허구로 믿는 경우가 많았다. 만일, 알렉산드로스가 동방과 모든 세계의 지리를 알았다면 그가 정복하려는 땅이 어디까지였는지 모르는 일이다.
로마제국에서도 대왕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그리스가 중심지인 동로마 제국에서도 존경받았다. 아예 당대 그림 중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묘사한 그림들이 다수 보일 정도다. 링크
친구 헤파이스티온과의 뜨거운 관계로 다른 방면에서도 상당히 유명하다. 또한 부하 장병들에게 현지 여성과의 결혼을 장려하였는데, 이 역시 그리스와 동양을 혈통적으로 결합하여 이상적인 세계시민을 양성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정된다.[24] 이런 동 • 서 문화 융합 정책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해서 반역 음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융합 정책 때문인지 로마 때는 폭군으로 기록되는 일이 많았지만 소아시아의 왕들 중에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로 부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또한 영웅시되는 일이 더 많았다. 일례로 티무르의 생애를 다룬 열전에서 그 지역의 위대한 왕들의 이름을 얘기할 때 알렉산드로스도 언급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수많은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이들을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한다. 이 알렉산드리아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꿈꾼 완벽하게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시험작들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이 도시들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문화가 어울리도록 조치하였고, 그에 따라 당시 서방에서 모을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문헌을 수집 배분하여 도서관을 설치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당시에 있어서 책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생각하면 알 것이다. 당시 그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샅샅이 뒤져서 책이란 책은 전부 다 몇 달이 걸리든 모조리 필사한 다음에 원본은 소장하고 필사본을 돌려줬다고 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알렉산드로스 당시에 수십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발흥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한 것이다.
2002년 이집트-그리스 우호의 일환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알렉산드로스 대왕 동상
세계 방방곡곡에 건설되었던 알렉산드리아는 모두 폐허가 되어 위치조차 알 수 없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바로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다. 터키의 항구도시인 이스칸데룬(İskenderun) 역시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렛타"라고 불리며, 스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후신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멸망한 뒤 같은 위치, 혹은 인근에 세워진 새로운 도시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양에서는 동양에 대한 우월감을 상징하는 인물로 쓰이기도 하며 이 인물 때문에 과거의 마케도니아와 관련없는 현재의 북마케도니아[25] 도 그리스와 관계가 복잡해진다. 아이러니한 건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지방을 어르느라 동방 여자와 결혼하고 문화를 받아들여서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욕을 단단히 먹었었다. 다만 한가지 짚어야 할 점은, 서양에서 전근대에 '동양'이라는 명칭은 동아시아가 아니라 오리엔트, 즉 중동 혹은 서아시아를 의미하는 명칭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리는 역사서들은 옹호와 비판의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옹호 쪽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예찬하는 경향이 지나쳐서 《창천항로》의 조조급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비판 쪽은 군사적인 면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잔인함과 술주정에 주로 집중하는 편이다.[26]
그 인기 때문인지 이슬람권에서는 침략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거쳐 서아시아 세계에 전파되어 그의 정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중세 이슬람권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을 영웅으로 대접했으며 수많은 전설들이 이슬람권에서 전해져 내려왔다. 자세한것은 이스칸다르 항목을 보면 된다. 심지어 무슬림으로 와전되는 전설이 있기도 해서 중근세 말레이 술탄들이 스스로 알렉산더 대왕의 후신이라고 자칭하기도 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 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스콜라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플라톤의 비중도 굉장히 큰 편이다. 한편 무슬림이나 크리스천이 "알렉산드로스의 전쟁을 성전이라 믿는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근거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선 정도는 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쪽에서는 역사적으론 침략자인 만큼 별로 취급이 좋지 않다. 전(前)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는 딸에게 대놓고 야만족의 우두머리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용명은 인도에 있던 군신인 스칸다에 흡수되어 인도에서 신이 되었고, 이것이 중국 불교로 전해져 위타천이 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이다텐이 되었다.
중국과 한국, 일본의 경우, 알렉산드로스 자체가 원래 동북아 문명권에서도 오랫동안 좋아해오던 전형적인 '영웅호걸' 스타일의 인물인데다 알렉산드로스에게 공격받은 장본인도 아니기에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가 오래 살았다면 세계 제국과 과학의 발전이 일찌감치 성공했으리라고 예상했지만, 거꾸로 그가 단명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남아 있던 헬레니즘 문화의 바탕인 오리엔트 문명이 그리스인들의 무지에 더욱 파괴되었을 것이란 반론도 있다. 사실상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제국을 그대로 계승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현실을 볼 때 설득력이 없는 의견이라고 볼 수는 없다.[27] 알렉산드로스 개인의 성격이 어쨌든 상관없이 말이다. 앞에서 말한 계획대로 로마로 진공했다고 해도 한니발이나 피로스의 신세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원본은 로마 장군이 연설하면서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우리 로마에 쳐들어왔으면 깨졌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주장은 당대에서부터 제기되었는데,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로마로 왔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물론 당시 로마와 마케도니아의 국력 차이와 인재풀을 생각하면 설사 원정을 실패해도 한니발과 피로스의 신세가 될 확률은 낮다.[28][29]
다만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당시 로마가 알렉산드로스를 이길 수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국력의 차이도 차이지만 당시 로마의 상황은 전혀 좋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에 태어나 기원전 323년에 죽은 사람인데, 그가 죽을 당시 로마는 2차 삼니움 전쟁 중이었다. 삼니움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에 있던 삼니움과 에트루리아 등 세력이 로마 공화국과 수십년에 걸쳐 겪은 분쟁으로, 로마 공화국은 이 전쟁의 결과로 이탈리아 중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후 이탈리아 남부 도시국가들과 피로스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로마는 이탈리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된다. 문제는 이 시점이 기원전 200년대 중반이다. 즉 알렉산더 생전에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도 아직 확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로마의 군사력은 이미 반도 내 다른 도시국가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이탈리아의 사실상 패권 국가긴 했으며, 당시 지중해에서 손꼽힐 정도로 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직 사방에 적들을 정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 지휘관 중 한명이 이끌며, 국력도 로마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국가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이진 않다.[30] 이를 감안하면 리비우스의 발언은 자뻑도 아닌 허세나 국뽕에 가깝다.
《구약성경》 <마카베오기> 상권[31] 에서는 저자였던 유대인들의 땅을 침략한 인물이다 보니 다소 부정적인 시선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만 이와 별개로 현대 이스라엘에는 알렉산드로스가 어원인 스칸다르(שערורייה)라는 이름이 존재한다.
키팀 땅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임금 다리우스를 쳐부순 다음, 그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많은 전쟁을 치르고 요새들을 점령하고 세상의 임금들을 죽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땅끝까지 진격하여 많은 민족에게서 전리품을 차지하였다. 세상이 그 앞에서 평온해지니 그는 마음이 우쭐하고 오만해졌다. 그가 막강한 군대를 모아 여러 지방과 민족과 통치자를 굴복시키자, 그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앓아 눕게 되자 죽음이 닥친 것을 알고는, 젊은 시절부터 함께 자란 대장군들을 불러, 죽기 전에 자기 나라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해를 다스리고 죽었다. 그의 장군들은 저마다 자기 영토를 다스렸다. 그들은 그가 죽은 뒤에 모두 왕관을 쓰고, 그들의 자손들도 그 뒤를 이어 오랫동안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
《구약성경》 <마카베오기> 상권 1장 1~9절
6.1. 이란의 평가[편집]
한편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전근대 이란인들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사산 왕조 시대 유행하던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관점이며, 둘째는 사산 왕조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등장한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역사에 존재한 그냥 유명한 영웅 중 한 명으로 보는 관점이다.
전자의 견해는 주로 조로아스터교 경전이나 사산 왕조 당대의 기록에 의거한다. 이에 따르면 로마인 알레크산다르는[32][33] 성스러운 경전들을 없애고, 성스러운 불꽃들을 꺼뜨렸으며, 이란을 쑥대밭으로 만든 악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이 악의 화신이란 말이 단순한 비유법이 아니라 악신인 아흐리만, 악룡 아지다하카, 투란[34] 의 왕 아프라시압 등과 함께 당당히 실제(?) 악의 화신으로 쓰여져 있다. 이렇게 사악한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으로 이란에 혼란과 분열의 시대가 찾아왔으나, 이를 수습하여 이란에 질서와 정의, 종교와 신앙을 되돌려 놓은 것이 바로 아르다시르 1세라는 것이 사산 왕조의 공식 입장이었다.
반면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구체적으로는 10세기 이후 피르다우시의 《샤나메》나 여러 작가들에 의해 저술된 《에스칸다르나메》 등에 등장하는 에스칸다르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에스칸다르가 사실 이란 혈통이라는 주장도 있고,[35] 이란을 정복한 후에도 "특별히 뭘 파괴하거나 사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 없다. 오히려 패배자인 다라 왕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자기 딸을 에스칸다르에게 결혼시켜 왕위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란의 왕이 된 에스칸다르는 세계 각지를 정복하며 위대하고 현명한 왕이 된다. 나중 가서는 정복왕이 아니라 현자, 예언자라고 쓸 지경이다.
이 같은 변화의 원인은 에스칸다르 전설 자체가 유럽의 알렉산드로스 전설들이 수입/번안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상당히 이슬람적/이란적 색채로 변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란이 타국 세력에 정복된 이후이고, 이란의 지배 세력이자 독자 정체성의 근간이던 조로아스터교 세력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외국 침략자에 대한 혐오가 상대적으로 약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사산 왕조 시대에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증오가 상당히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났음은 전술한 대로다.
현대 이란의 일반적인 평가는 "비록 적이었지만 솔직히 대단했다는 건 인정함." 정도이다. 워낙 오래된 일인 데다가,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의 공주인 록사나와 결혼하는 등 동서 화합을 모색했고, 키루스 2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하는 등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에 현대 이란의 평가는 꽤 좋은 편이다. 때로는 그냥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중세 이후에는 신화적인 존재나 위대한 왕으로 묘사한 경우가 굉장히 많으며 대표적으로 페르시아의 시인 니자미가 지은 《이스칸다르의 서》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매우 긍정적이고 영웅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만, 이 동네도 모든 사람의 생각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 (칭기즈 칸과 함께) 페르세폴리스를 파괴한 악마적인 이미지도 물론 있으며[36] 영웅적인 이미지와 양립하는 중이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샤나메》에 등장하는 사악한 마왕 자하크의 모티브가 다름 아닌 알렉산드로스 3세로 추정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샤나메》에 묘사된 자하크의 주요 일생이 알렉산드로스 3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둘 다 서쪽에서 페르시아로 쳐들어왔으며, 어머니와 근친상간 관계를 했거나 혹은 그랬다는 의혹이 있으며, 왕위에 오르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했거나 그런 혐의를 받았다. 또한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들의 경전을 불태우고 사제들을 죽였다고 주장하는데, 《샤나메》의 자하크 역시 조로아스터교를 박해했다. 아울러 알렉산드로스 3세의 탄생 설화 가운데는 그가 뱀으로 변신한 제우스와 어머니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자하크 역시 매우 용맹스러워서 용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뱀을 용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 이런 유사성을 감안할 때,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알렉산드로스 3세에 대한 조로아스터교도와 페르시아인의 오랜 증오가 《샤나메》의 마왕 자하크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추정된다.[37]
7. 대중문화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알렉산드로스 3세/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어록[편집]
희망.[38]
가장 강한 자![39]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겠다.[40]
좋다. 왕들과 겨룰 수 있다면.[41]
두려움을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한다!
한 마리 사자의 지휘를 받는 양의 군대가 한 마리 양의 지휘를 받는 사자의 군대보다 두렵다.
내가 파르메니온이었다면 받아들였을 것이오.[42]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할 수 있는 한, 연기를 계속하리라.[43]
우리의 가장 큰 승리는 패자들과 다르게 처신하는 것임을 그대들은 모르는가![45]
내가 죽거든 손을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 수 있게 하라. 천하를 쥐었던 알렉산드로스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할 뿐.
9. 여담[편집]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의 모델이 된 왕이 바로 그라고 전해진다.[46] 사실 원전인 그리스 신화 쪽에서는 그 이야기의 모델이 미다스 왕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정복 과정에서 해당 신화가 전해지면서 그 주인공도 알렉산드로스로 변했다.
- 알렉산드로스는 그 유명한 록사나와 결혼하기 전에 아주 아끼는 애인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캄파스페(Campaspe)라는 여인으로, 그녀의 젊을 적 몸매와 미모는 대왕이 흠뻑 빠질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어느날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를 그림으로 기록해야 된다는 생각에 자신의 전속 화가에게 의뢰를 맡기는데 그 화가가 바로 고대 그리스 극사실주의의 대가로 유명한 아펠레스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만 두 사람이 정분이 나고 말았고 어느 날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가장 아꼈던 화가와 가장 총애한 애인의 정분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여기서 압권인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물론 분노하긴 했으나 그들을 결국 용서함과 동시에 아펠레스에게 가장 사랑했던 애인까지 넘겨주는 쿨하다 못해 얼어죽을 거 같은 냉정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후대에 "박물지"를 펴낸 고대 로마의 학자 대 플리니우스는 이 일화를 기록하며 "대왕은 화가에게 여인을 선물로 하사했다. 위대한 대왕의 너그러운 천성 덕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이기는 대왕의 자제심은 더욱 위대했고 그의 관대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이 거뒀던 어떠한 다른 대승에 견주어 모자람 없는 위대한 업을 이뤄냈다!"라고 평하였다. #, #
- 《탈무드》에서도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이 믿는 정의에 대해 알고자 하는 그에게 쓰레기 속에 있던 금덩이의 일화를 듣고는 "나라면 그 둘을 모두 죽이고 내가 그 금덩이를 차지하겠다. 그게 나의 정의다."라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유대인 입장에서 쓴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타 지역과 민족을 정복하면서 보여준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유대 지역은 그들 자신의 야훼 신앙을 알렉산드로스의 후계 디아도코이 국가 중 하나였던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부정당하고 탄압을 심하게 받은 적이 있어 헬라계 지배자들에게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성경 내에는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선 것을 보거든"이라는 관용구가 나오는데, 이게 무려 유대인들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다가 제우스 신상을 세운 것을 의미한다. 당장 유다 마카베오가 평생 대항하고 싸운 것도 이 셀레우코스 계통의 헬라인 정권이었고, 우리나라로 비유하면 거의 1930년대의 민족 말살 정책을 펴던 일제강점기 말기 시기에 갖게 된 원한과 거의 일맥상통한다.[47]
- 상기한 대로 아랍어권에서는 '이스칸다르'로 넘어갔는데, 이것이 오스만 제국 시기 알바니아 출신의 명장에게 별명(이스칸다르 베이)으로 붙여졌고, 이 명장이 알바니아 독립운동을 이끌면서 현지어로 별칭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스칸데르베그이며, 이 명장이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다.
-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인도 문화권에는 '스칸다'라는 별칭이 있는 토착 군신 무루간이 있었고, 위의 이스칸다르와 융합하여 인도에서 군신으로 섬겨지지 않았나 하는 학설이 있다. 참고로 이 스칸다는 불교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색건타', 다시 줄여서[48] '건타'가 되었고 이를 오독하여 '위타', 거기에 신격을 나타내는 천(天)을 붙여서 '위타천'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정리글
- 로마 원수정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좋아하지 않은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조차 극찬한, 고결한 황태자이자 장군 게르마니쿠스가 많이 비견된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의 절대적 아이돌 중 한 명이었다. 따라서 고대 로마인들에게 있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교되면서 버금간다, 못지않다고 이야기를 듣는 것은 로마 남성들에게 큰 칭찬이자 극찬이었다. 물론 이때 로마인들은 이렇게 알렉산더 대왕을 극찬하면서도, 게르마니쿠스 평가의 사례처럼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 부모와 동생에 대한 인격적 완성은 그렇지 않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휼륭했다."라고 평가했다.
-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군인황제 카라칼라가 아주 어린 나이부터 무척 동경하고 사랑한 정복군주였다. 그는 대왕처럼 군사적 재능이 천부적 천재는 아니었지만, 군사적 업적이 대단했고 군사적 재능 역시 역대 로마 황제 중 매우 뛰어났다. 카라칼라는 늘 대왕이 했다는 모든 것을 따라하고 그가 방문했다는 곳을 행군 중 반드시 들렸다. 따라서 당대 로마의 학자, 관료이자 역사가 헤로디아누스나 당대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경하는 것을 넘어 지나칠 정도로 대왕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고 전한다.
-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어린 시절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매우 동경했다고 한다. 실제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올라 콘스탄티노폴리스 및 많은 영토를 정복하여 비슷하게 정복자로 불리는 대업적을 이루었다.
- 성인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마에 큰 흉터가 났는데, 아무래도 전쟁 과정에서 생긴 후천적인 상해로 추정된다. 일단 알렉산드로스 본인이 전쟁광이기도 했다. 어느 날 대왕이 화가를 궁전으로 불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는데, 화가가 고심 끝에 대왕이 이마를 손으로 지그시 괸 채 사색을 하는 아주 근사한 초상화를 그려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칭찬을 받고 본인도 명성이 높아졌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로 대왕의 흉터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유명하다.